화양연화를 봤다. 보고나니 너무 감동, 머리만대면 바로 자는 내가 누워서 바로 잠들수 없었을 만큼, 강한 인상의 영화였다. 오늘도 실험을 대충 하는둥 마는 둥(=몸을 써야하는건 내일로 미루고, 컴퓨터 앞에서 할수있는 것만 하면서..), 어딘가 끄적여야 풀리리라 직감하고 대충 정리해본다.
보면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 앞부분에 마작하는 부분과, 송강호와 김옥빈이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들이 교차되어 생각났다. 1960년대의 홍콩의 분위기는 자기만의 공간이 없을만큼 좁고 북적거린다. 좁은 통로를 교차하면서 아슬아슬하게 감정이 오간다. 고백, 헤어지는 연습, 실제로 헤어짐. 그렇게 수순대로 흘러가고 몇년이 지났지만, 양조위가 싱가포르 지사로 옮기고 난 후에도 장만옥이 아이가 생기고 난 후에도 그 아쉬움은 지울수 없었다.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주인공 남녀가 이탈리아에서 어린시절의 추억, 오해로 인해 이루지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을 부둥켜 않고 살아가던 모습도 떠오른다.
사랑은 쉽게 증발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련함은 영원하다. 그 색깔은 바래지고 흐릿하겠지만,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각자는 그 장소를 자신만의 창으로 바라볼 것같다.
캄보디아에 홀로 가서 돌기둥에 난 구멍에 입을 대고 속내를 다 털어넣고 묻으려하는 양조위. 굳이 캄보디아를 왜갔을까 싶다. 후속편에 대한 암시(호텔방 번호가 2046임)가 보였는데, 캄보디아도 마찬가지인가?
그 둘은 끝까지 넘어여할 선을 넘지 않는데, 결정적으로 궁금한 부분은 비오는날 이별연습을 끝내고 돌아오는 택시에서 장만옥이 양조위에게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후의 장면은 편집이 되었다고하는데, 편집된 부분에 대해 공개된 스틸컷은 다음과 같다. 알아서 생각하시길..
이동진기자의 소개글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0110670276&srchCol=news&srchUrl=news3
많은 왕가위 감독 팬들이 그렇듯, 지난달 말 개봉한 홍콩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보면서 자꾸 떠오른 것은
그의 90년작 '아비정전'(阿飛正傳)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왕가위 영화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비정전'은 발없는
새처럼 허공을 지친 날개짓으로 떠돌아야 했던 한 사내의
황폐한 사랑을 통해 쓸쓸한 내면을 그려낸 작품이지요.
각자의 배우자끼리 불륜관계인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화양연화'의
이야기 자체는 사실 '아비정전'과 별 접점이 없어 보이지요. 하지만
속울음만 길게 우는 기본 정조에서 좁은 실내 공간을 강조하는 구도,
60년대 홍콩을 다룬 시공간적 배경, 두 영화에 모두 출연한 장만옥과
양조위라는 배우까지 공통점이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극중 여주인공
이름이 수리첸(蘇麗珍)으로 똑같고, 심지어 둥근 벽시계를 종종
클로즈업해 담아내는 장면들까지 비슷하지요.
'아비정전'을 잊지 못할 20대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 제가 그
영화의 냄새를 '화양연화'에서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왕가위는 이에 대해 " '아비정전2'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면서도 "10년 전에 '화양연화'를 찍었다면 '아비정전'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남겼지요.
'아비정전' 서두에서 바람둥이 아비는 체육관 매표원인 리첸에게
다짜고짜 시계를 1분간 보자고 한 뒤 "우리가 함께 한 1960년 4월16일
오후 3시의 이 1분을 난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지요. 그
1분은 이를테면 리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시간이었지요.
그와의 짧은 사랑이 끝난 뒤 오래오래 속앓이를 하면서 그 순간을
내내 잊지 못하니까요. 리첸은 흔적 없이 흘러가 버리는 토막 시간을
영원으로 바꿔내는 마술에 매혹된 것일까요. 하지만 리첸의 사랑에
진정으로 허락된 현실적 시간은 그저 그 1분이 전부였던 셈입니다.
영화 속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길고 애틋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화양연화'의 끝내 가닿지 못한 사랑의 시간 역시 '찰나'이었음은 다를
바가 없는 듯 하네요. 이 영화는 차우와 리첸의 관계를 가슴 저리게
그리면서도 그 사랑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낭만적 대사 한 마디
없이 간접화법 만으로 일관하지요. 국수를 먹거나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담아내는 것 같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들의
엇나간 운명에 한없이 슬퍼지는 기이한 체험은 바로 감추면서
드러내고 변죽만 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핵심과 본질에
다가서게 하는 왕가위 특유의 화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화양연화'는 사랑의 밀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둘이 좁은
실내에서, 골목길 계단에서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되풀이해 스케치합니다. 스쳐감의 반복으로 사랑의 시간들을
인수분해하는 이 영화의 스타일은 곧 그 스쳐가는 찰나의 경험이 바로
사랑의 전부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와 긴 숲을 지나더라도, 사랑은 결국 함께 바라본 1분이나 몸을
돌려세우며 스쳐 지나간 몇 초 같은 찰나에 목을 메고 있는 셈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함께 바라보기, 그리고 닿지 못하고 스쳐가기. 그 두
가지 외에 사랑에 또 어떤 게 있던가요.
'화양연화'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말이라지요. 이
영화에서 '화양연화'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리첸과 차우는 이별을 예감하고 각자의 집에서 처연한 얼굴로
앉아있지요.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직전의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장면의 의미는 뭘까요. 그건
실현되지 않은 소망을 품은 찰나만이 비로소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닐까요. 이뤄졌다면 그 시간들은 그저 가치를 마취시키고
의미를 흩뜨리는 바람에 영원이 되지 못하고 좀 더 긴 찰나의 연속에
머무르고 마는 게 아닐까요.
'화양연화'는 캄보디아 고대 유적 앙코르와트를 찾은 차우가 영원을
상징하는 태고의 벽에 남은 구멍에 대고 비밀을 말함으로써 사랑을
봉인하는 의식으로 끝맺습니다. '아비정전'에서 아비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으니 그 1분은 지울 수 없어"라고 했던가요. 세월이 흘러도
리첸과의 이루지 못한 인연을 들끓는 현재로 가슴 아파하던 차우는
그렇게 사랑의 아픔을 앙코르와트에서 과거로 봉인함으로써 비로소
영원을 기약할 수 있게된 겁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 영원은 완성과 성취가 아니라
엇갈림과 쓰라림 속에 깃든다는 것. 그리고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결국 봉인된 찰나라는 것.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의 진정한
공통점입니다.
( 이동진 드림 djlee@chosun.com )